오욕의 꽃
˝현지야, 그리고 경철아, 우리는 노예야, 알았지?˝
[미리보기]
제1장 꽃이 꺾이다
대학을 자퇴한 후에도 마성진의 생활에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뭐가 됐든 일자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식품 회사에서 운송 일을 해보았지만, 근성이 없는 마성진은 한 달만에 싫증이 나서 그 회사를 그만둬버리곤 했다.
가난한 학생이었던 그는 대학에 다닐 때도 출판사 창고담당, 택배사 발송담당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어느 것이고 삼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마성진은 한 가지 일에 열중할 수 없는 자신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싫증 잘 내는 성격은 시골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뇌일혈로 갑자기 죽고 난 후 더욱 심해져서, 이제 고생하여 대학에 다니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생각되어 스스럼없이 자퇴서까지 내고 만 것이다.
대학을 그만두었을 때에 마성진은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마성진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 3년째 살고 있다. 코딱지만 한 방 두 개가 있는 아파트는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천장도 여기저기 갈라져 있다. 이런 낡은 건물에서 3년이나 버텼구나 하며 가끔 쓴웃음을 지을 때도 있었지만, 사실 게으른 성격 탓에 이사할 염도 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 집값이 오죽 비싼가?
집 주인 또한 마성진과 마찬가지로 게을러 터져서 월세가 밀려도 독촉 전화 한 번 없고, 집수리를 요구해도 귀찮아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마성진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인 집이었다.
마성진은 그런 아파트에 종일 틀혀박여 있는 날이 많아졌다. 이제 직장을 구하는 일도 겁이 나고, 구한다 해도 어떤 일에도 흥미를 갖지 못하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전부터 애독하고 있던 성인 웹사이트에 투고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소설을 쓸 만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기묘한 성벽(性癖)만을 믿고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쓰면서 묘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기묘한 섹스의 황홀경에 빠져들어 한 손으로 사타구니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글을 썼다.
* * *
둘은 작은 모래 언덕 그늘에 숨어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며 포응하면서 서로의 입을 구했다. 사랑과 욕망으로 가득한 그녀의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좀 사랑해 줘.
그녀의 이 말에 흥분하여 상대방의 수영복을 벗겨 주었다. 그가 끌어안은 팔 속에 방금 바다에서 올라온 인어처럼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싱싱한 나체.
그의 입은 풍만하고 팽팽한 유방을 애무했으며 불쑥 일어선 젖꼭지를 입에 물고는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뒤로 휘어지면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유방에서 배로, 나체를 구석구석 애무한 입술과 혀는 어느새 무성한 블론드의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햇살에 그을은 허벅다리 안 쪽으로 비밀스럽게 숨쉬고 있는 여인의 살짝 닿은 입술.
순간, 그의 입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가더니 그녀의 벌거벗은 엉덩이 쪽으로 이동을 했다. 어느 틈에 그의 손엔 혁대가 들려있었고, 그녀의 맨 엉덩이를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아∼흑! 좋아. 너무 좋아. 세게, 좀더 세게.
그녀의 입에서 비명소리 대신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혁대를 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가했다.
* * *
축축히 젖어가는 눈으로 찢어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도 경우에 따라서 이렇게 신명나게 일을 할 수가 있구나 하고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사흘간 라면과 빵조각만으로 때우면서 세수도 하지 않고 기묘한 창작에 전념하였다. 손톱에는 까맣게 때가 끼고, 피부는 거칠거칠해지고 콧구멍에는 시커먼 코딱지가 생기고, 방안에는 악취가 돌기 시작했지만, 마성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만 사흘에 걸쳐 열과 성을 기울여 성애소설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메일로 그 원고를 발송하였다. 물론 그것이 잡지에 꼭 실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성인사이트를 둘러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 뜨거운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이상성벽, 즉 SM이라고 지칭되는 것에 마성진은 가슴 뛰는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투고한 잡지에 그의 작품이 실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성진은 왠지 자신의 노력과 열의를 우롱당한 듯한 불쾌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늘 잡지에 등장하는 쓸데없는 첫 경험 사례니 그런 것들에 비하면 자신의 글을 싣는다면 얼마나 잡지가 폼이 날 것인가
마성진의 소설은 대개 사디스틱하거나 마조히스틱한 것들이었다. 자신이 철이 들었을 때부터 그러한 사디스틱하고 마조히스틱한 성의 환상에 시달려온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왜 여체에 대한 집요한 정념을 사디스틱한 형태로 연소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시작한 자신의 작품은 이상 성애를 현실과 관념의 두 가지 면에서 다룬 문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루지 않고 케케묵고 먼지 앉은 싸구려 글들만 늘어놓고 있다니…… 마성진은 그런 한심한 편집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집에 돌아가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Bondage 사진들을 보면 마성진의 마음은 어느덧 진정되어갔다. 말한 것도 없이 마성진의 관능이 기분 좋은 흥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에 결박되어 있는 여인, 결박된 채 채찍질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는 소녀……
사이트에 떠오른 모델들은 모두 똑같이 생기 없는 표정을 하고 몸매도 형편없었지만, 마성진은 그 모델의 용모나 육체에 좋아하는 탤런트나 가수, 영화배우를 하나하나 넣어보며 황홀한 장밋빛 망상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녀들의 교만한 미를 파괴시켜 이처럼 무참한 모습으로 묶어 두고 마음대로 데리고 놀면 얼마나 통쾌할까. 게다가 그 사이트에는 관장을 테마로 한 그림과 글들이 제법 있었는데, 공상의 미녀를 친친 묶어놓고 무조건 관장을 시켜 배설을 하게 만드는 데 이르자, 마성진은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흥분을 느꼈다.
물론 그 사이트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유로사이트다. 전에는 굳이 이런 사이트에 돈을 내는 것에 대해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생물 아닌가? SM이든 뭐든 이상 성벽을 다른 사이트들이 인터넷에 널려있는 것은 어쩌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불가해한 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리얼리즘 정신의 산물이라고 마성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이치는 어찌되었건 지금의 마성진에게 있어서는 인터넷 사이트 속의 도원경에 빠지는 것만이 삶의 보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성진 앞의 현실은 막막했다. 이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면 과연 자신의 인생에서 쾌락이라는 것을 얻을 수나 있을지 하는 삭막한 심경이 드는 것이었다.
마성진은 스물네 살이었다. 청년의 다감한 피가 끓는 나이가 아닌가? 남들처럼 애인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공상과 망상 속에서는 절세의 미녀를 음란하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마성진이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제 여자라면 아무라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의 여자라고 하는 여자는 전부 자기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마성진은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어서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뿐더러 걸음을 걸을 때도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부정하게 해서 걷는다.
표정은 항상 음침했고, 피부색마저 묘하게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마성진은 종종 그런 것들 때문에 여성들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라도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정혼을 기울여 쓴 성애소설이 채택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게 되자, 마성진은 다시 원래의 허무상태로 떨어졌다.
대체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마성진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염세관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그을음투성이의 창밖으로 붉은 빛을 띤 태양이 황량한 인가의 지붕 아래로 떨어져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마성진은 그저 공상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미녀들을 납치해서 지방의 한 작은 산 속에 감금해놓고 자신이 정념을 만끽할 때까지 고문하는 공상 - 그 다음은 하이재킹으로 수억 엔의 돈을 챙겨 다른 나라로 망명한다는 바보 같은 망상.
공상과 망상에 지칠 즈음에야 그는 공복을 느낀다. 이불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와 풀어진 눈을 끔뻑거리며 그는 걷기 시작한다.
단골이 되어버린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을 시켰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도 이제 질린 탓이다. 하여튼 이것이 그의 저녁식사였다. 주머니 속의 남은 돈을 계산하면서 학교 다닐 때 자주 갔었던 카페에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카페에는 여전히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학생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왁자지껄, 미래가 어떻고, IT사업이 어떠느니 창업투자가 어쩌니 하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목청 높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성진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런 젊은 속에서도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열중하여 흥분하는 일들은 뭔가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마성진에게 당장 급한 문제는 내일부터의 밥값이었다. 생각해 보니 방세도 석 달이나 밀려있다.
마성진은 휭하니 그 카페를 나왔다. 쩍쩍 달라붙을 듯 차가운 네오불빛 아래를 마성진은 고양이 등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걸었다.
그때였다. 마성진의 곁을 지나던 검은색 중형차가 갑가지 멈추더니 클락션을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대학 동기인 현기영이란 친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딜 가는 데 멍청하게 걷고 있냐, 마성진.”
현기영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타! 술 마시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사실 그와 별론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는 마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조수석에 웬 여자가 타고 있었다.
“이 녀석, 바로 얼마 전에 학교를 그만 둔 마성진이라고 해. 음침해서 전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녀석이지.”
현기영은 옆의 아름다운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마성진을 소개했다.
현기영의 아버지는 큰 건설회사의 사장이다. 부잣집 아들인 데다가 핸섬보이여서 그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건 당연했지만, 지금 옆에 있는 여자가 그가 데리고 다녔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유현지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마성진을 돌아보며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용모를 정면으로 본 마성진은 그 단아한 미모에 압도되어 엉겹걸에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웨이브진 밤색 머리칼의 아름다움. 볼선이나 목선도 매끄럽고 섬세하며 피부는 상세하게 빛나고 있다. 게다가 언뜻 넘겨본 몸매도 완연한 굴곡이 느껴지는 게 뭐라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어때, 내 애인 꽤 미인이지?”
현기영은 신호를 기다렸다가 차를 출발시키며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게다가 이 아가씨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유예지 씨의 동생이야.”
그으래? 하고 마성진은 일부러 놀란 듯한 소리를 냈다.
유예지는 국내외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 그 뛰어난 미모로 자주 여성지에 실렸다.
올해 나이 서른. 전 외교관 부인으로 스물여섯에 미망인이 된 여성이다. 어쩐지…… 그런 언니를 뒀으니 저렇게 예쁘겠지.
현기영은 유현지와 어깨를 맞대듯이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두 청춘이 여기 있구나 하고 마성진은 뒷좌석에서 두 사람을 묵묵히 관찰했다.
현기영은 강남의 한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저기야. 따라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979-11-6091-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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