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그녀
“너, 널… 가져도 되겠니?” “그렇게 묻다니…. 우습잖아요.”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아…”
[미리보기]
클럽 ´B´의 저녁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늦게까지 일에 매달려있던 나는 몹시 피곤했지만 발걸음은 어느새 클럽 ´B´로 향하고 있었다.
적당한 양의 술로 가볍게 위를 자극하고 집에 돌아가 침대에 쓰러져 잠드는 것은 피곤을 느끼지 못하고 잠을 잘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내가 문을 밀고 들어서자 섹시하게 그을린 리키 마틴의 음악이 공기를 울리고 있었다.
주인 사내의 친숙한 눈인사를 받으며 나는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밖은 아직도 더운가요?”
주인이래봤자 내 나이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주인 사내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의례적인 인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주인 사내도 내 스타일을 이미 파악했는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늘 마시는 술을 내 앞으로 밀어주고는 자리를 떴다.
내가 클럽 ´B´를 자주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묵시적인 편안함 때문이었다.
라틴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있자니 한 자리 건너에서 여자애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이미 알코올에 뇌를 점령당했는지 평형 감각을 상실한 채, 연골이 없는 우주인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몸짓으로 테이블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햅번 시대의 굵은 테의 선그라스를 머리에 걸치고, 목까지 올라오는 소매가 없는 연두빛 셔츠와 엉덩이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닐 재질의 빨간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탄력있게 올라간 엉덩이에까지 닿을 정도로 머리를 기른 여자애는 두 눈을 감고 흐느적거리듯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애가 움직일 때마다 연두빛 셔츠에 일렬로 길게 달려있는 작은 단추들이 빛을 반사했다.
스무 살이 조금 넘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튀는 의상을 입었어도 얼굴엔 아직 앳띤 소녀의 자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피부였지만 알콜 기운으로 발그스레 붉어진 뺨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열기가 올라오는지 여자애는 역시 몸을 흐느적거리며 목에서부터 단추를 따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 개의 단추들이 구멍에서 이탈했을 때 얼핏 여자애의 가슴 계곡이 보이는 듯도 했다.
몹시도 색정적인 모습이었다.
여자애의 주위에 있는 테이블의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여자애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여자애는 그런 것쯤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 번째로 배달된 맥주를 마시며 여자애를 지켜보았다.
빨간 미니스커트의 여자애는 춤을 추다가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담배를 몇 대 피우며 맥주를 반쯤 비우고, 다시 춤을 추고 하는 식으로 혼자서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요즘 애들은 저런 식으로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게 지내는 것인가 보다, 하고 나는 생각하면서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애는 아직 남자의 속성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여자애의 선정적인 몸짓을 보고 일말의 욕정이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뭘 어찌 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여자애는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만의 시간을 구축하기 위해 클럽 ´B´를 찾은 또 다른 손님이었고, 그것은 존중되어져야 할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리고 나의 일시적인 흥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각자 즐기고 깨끗이 주워담으면 그뿐이었다.
그때 우스운 일이 일어났다.
주시당하는 그런 본능적인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자 내가 병을 쳐들고 맥주를 꼴깍거리는 모습을 어느 틈에 자리로 돌아와 앉은 빨간색 미니스커트의 여자애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탁자에 두 팔을 올려 기대고서, 벗어 든 선글라스의 발을 입술에 톡톡톡 두드리며 나를 찬찬히 뜯어보듯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방금 전 테이블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 혹은 약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던 여자애의 풀린 눈은 아니었다.
나는 옆과 뒤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주위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하긴 스무살이 갓 넘어 보이는 요즘 여자애의 머리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또 다른 심심풀이 놀이감으로 당첨이 되었다해도 그건 순전히 그녀의 결정일 뿐이니까. 그렇다해도 이런 주시당함은 어쩐지 쑥스럽다.
“왜 그러지?”
음악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다.
여자애게까지 충분히 전달될 정도의 높이였다.
하지만 여자애는 묵묵히 왼손에 벗어 든 선글라스의 발만 입술에 두드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동작은 여자애의 모습을 그녀의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동작…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몇 분 정도를 여자애와 눈을 맞추고 머리속에서 감질맛나게 생각날 듯 말 듯 회전하고 있는 영상을 잡으려고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지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다.
지니도 버릇처럼 선글라스나 안경 따위의 다리를 저 여자애처럼 입으로 가지고 놀았다.
어느 때는 맛있는 사탕이라도 되는 듯이 빨기까지 했었지. 음…. 나는 짧게 신음하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겨우 수습해가던 지니에 대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떠오른 기억은 쉽사리 털어지지 않았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맥주를 들이켰다.
´나에게 시간을 줘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그것뿐이예요.´ 전화기 너머로 내뱉듯 던진 그 말이 지니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지니와 나의 관계에 어떠한 문제가 잠재되어 있었다는 걸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며칠을 보냈다.
지니와 나 사이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니를 생각하자 두통이 밀려왔다.
우울한 기분으로 나는 다시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애는 여전히 아무 말없이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10분쯤 지나자 도무지 신경이 쓰여서 그냥 있을 수가 없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애를 보았다.
“아니, 왜 그러는 거지?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약간은 신경질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따위 오늘은 달갑지 않았다.
잠시 동물적인 본능으로 여자애를 쳐다본 댓가라고 가볍게 흘려버릴 마음적 여유가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아저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빨간색 미니스커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론이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웃을 수만 있다면 소리를 지르며 한 시간 동안 킬킬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냥 깨끗이 도움이 필요해요.”
그렇게 말하고 빨간색 미니스커트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에 비어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얼핏 보니 주인 사내가 내 쪽을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왜 나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얌전히 원하는 만큼 알콜을 섭취하고 조용히 침대로 가서 눕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의 바램은 미니스커트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었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979-11-6091-7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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